김병상 몬시뇰 선종
독재정권 아래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을 위해 온 몸을 던졌던 인천지역 민주화운동의 대부이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전 대표인 김병상 몬시뇰이 4월 25일 오전0시 선종했습니다. 향년 88세입니다. 몬시뇰이란 가톨릭에서 주교품을 받지 않은 명예 고위성직자의 명칭이다.
각계각층에서 민주화 운동의 대부였던 고인에 대한 추모가 이어지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도 "하늘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 믿는다"면서 고인을 애도했습니다.
김병상 몬시뇰 선종...향년 88세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원로사목)이 4월 25일 0시 5분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에서 선종했습니다. 고인은 2018년 3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요양시설에서 머물러왔습니다.
고인의 분향소는 인천시 동구 박문로 1 인천교구청 보니파시오 대강당에 마련됐습니다. 장례미사는 27일 오전 10시 답동 주교좌 성당에서 봉헌됩니다. 장지는 하늘의 문 묘원 성직자 묘역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또 한 분의 어른이 우리 곁을 떠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25일 페이스북을 통해 "김병상 몬시뇰신부님의 선종을 슬퍼한다"며 "또 한 분의 어른이 우리 곁을 떠났다"고 고인을 애도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김 몬시뇰) 신부님은 사목 활동에 늘 따뜻했던 사제이면서 유신시기부터 길고 긴 민주화의 여정 내내 길잡이가 되어준 민주화운동의 대부였다"며 "민주화를 위해 애쓰며 때로는 희생을 치르기도 했던 많은 이들이 신부님에게서 힘을 얻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제가 국회에 있을 때 국회에 와서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국미사'를 주재해 주기도 했고, 청와대에 입주할 때 와서 작은 미사와 축복을 해주기도 했다"고 김 몬시뇰과의 개인적 인연을 소개한 뒤 "이제 하늘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 믿는다"며 "오랫동안 병고를겪으셨는데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고 추모했습니다.
김병상 몬시뇰은...
김병상 몬시뇰은 2006년 11월 38년간의 사목 일선에서 은퇴한 뒤 지난 2008년~2013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참여하며 사회선교 활동을 계속했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2018년 3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요양시설에서 머물러왔습니다.
고인은 1932년 충남 공주 교우촌 요골공소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다 16살에 서울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해 사제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폐결핵에 걸려 53년 7월 신학교를 중도에 하차하고, 1961년 홍익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1963년 33살 때 서울가톨릭신학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1969년 12월에야 38살의 늦은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김병상 몬시뇰은 1974년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유신독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면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되자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이어 일체의 정권 비판 행위를 원천적으로 금지했던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가 극에 달했던 1977년 인천교구 총대리 겸 부교구장으로 답동성당에서 ‘유신헌법 철폐’와 ‘언론자유 보장’이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특별 기도회를 열었다가 경찰에 구속됐습니다.
그가 투옥되자 수많은 사제들과 신자들이 석방 촉구 기도회를 열고, 동창 신부들이 단식농성을 감행해 15일 만에 풀려났습니다. 그는 그 뒤에도 함세웅 신부, 김승훈 신부 등과 함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이끌며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행동했습니다.
1976년~80년 인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대책위원장을 맡아 노동자를 보호했으며, ‘굴업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인천시민모임’ 상임대표도 지내면 핵폐기장 백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는 1989년~95년 정의구현사제단 공동대표를 할때는 기간 인천에서 양심적인 지식인 40여명과 함께 만든 ‘목요회’의 초대 회장을 맡아 인천시민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또 실업극복국민운동 인천본부 상임대표와 인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았고, 2004년 학교법인 인천가톨릭학원 이사장 대리도 지냈습니다.
고인은 정의구현에만 앞장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인은 인천 만수동성당에서 신자들부터 교육해 신자를 배가시키는 ‘새로운 양 찾기 운동’을 시작해 가톨릭 교세가 놀랍게 성장하게 하는 동력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가톨릭이 사회 정의에 기여하면서, 외적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평소 “신부로서도, 민주화운동에도 헌신적으로 투신하지 못해 하느님 앞에 부끄럽다”며 겸손한 자세로 일관했습니다.
그는 “‘사회 정의’에 투신하며 앞장섰다고 후방에 있었던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며 “뒤에서 욕해 가면서도 지켜주고 후원해준 이들이 있었기에 앞에 선 사람들이 민주화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특히 “교회가 좀 더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배려해 교회에 활기가 넘쳤으면 좋겠다”고 젊은 교회를 지향했습니다. 고인은 늦깎이로 사제가 되어 동창신부들과 10년 이상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일찍부터 젊은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성직자 중에서 젊은 사람들과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신부로 꼽히기도 했습니다.